
戀君之情
도화
태시제 이민이 세상을 떠났다. 고윤, 또는 고윤 이전의 대장군들이나 황제들과 비교하면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 물론 그는 대장군은 아니었으나 몇 번이고 꽤 긴 시간 동안 전쟁터에 머물렀고, 평범한 사람이라면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할 백홍 화살을 거뜬하게 들어 쏘기도 하였다. 그 탓인지 주변인들은 모두 그가 건강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르골이 몇십 년이나 들어 앉아있던 몸이 그리 오래 쓸 만하겠는가? 이것은 진경서와 같은 명망 높은 의원이 해결해보려 애쓴다 한들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무엇보다 진경서가 마음을 놓으라 하였던 것은 우르골 발작을 대비하여 안신산을 준비해두던 그에게 한 말이지, 언젠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독의 후유증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이 아니었던데다 그 누구도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고, 그녀 또한 알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고윤과 같이 몸을 주로 쓰는 사람은 아프다면 그 아픔이 밖에서부터 티가 날 것이지만, 해독이 거의 불가능했던 독을 품고 이십여 년을 살아온 장경과 같은 사람이라면 안에서부터 천천히, 눈에 띄지 않게 망가지기 시작할 터였다. 행복한 여생을 보냈으나 안은 곪아가고 있었으니, 허망하게 가더라도 받아들이고 평화롭게 보내주는 것이 맞았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만백성이 슬퍼하였고, 현 황제 또한 황숙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모두가 그의 업적을 기렸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동안 곡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만큼 태시제는 훌륭한 사람이었고 만민이 칭송하는 황제였다.
그렇다면 안정후의 의붓아들로서는 어떠하였을까. 대외적으로 안정후는 대량제국의 영웅이자 태시제를 키워 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그들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고윤이 이민을 키워내긴커녕 거의 방치하다시피 했다는 점과 그들이 평범한 의부자 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안정후는 그의 의붓아들이 어렸던 안회 마을 시절부터 은퇴한 태시제가 될 때까지 그를 아명으로 불렀다. 보통 장성한 성인이라면 아명으로 불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겠지만, 태시제는 고윤이 그를 장경이라 불러주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도 그의 품에서 아명으로 불리었을 것이다.
전 안정후부인 상황(上皇)의 별장은 조용했다. 나이 든 시종들은 내보내 여생을 살게 하고, 근 몇 년간 직접 쓸고 닦으며 애착을 붙인 이 넓은 후부는 두 사람의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항상 이곳을 가득 채우던 두 사람의 소리가 사라지자 후부의 주인은 홀로 쓸쓸히 술잔을 기울였다. 평소라면 적당히 마시라 잔소리를 했을 장경이 없으니 고삐가 풀린 고윤은 어느새 한 병을 다 비워가고 있었다. 한 잔씩 마시자 감질이 났는지 고윤이 병째로 술을 들이켜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자희, 얼마나 마시려는 거야.”
심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젊은 날의 고윤은 신분과 안정후라는 직책 덕분에 아주 방탕하지는 않았으나, 방탕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수준으로 여기저기를 쏘다니고 술을 마셨다. 그의 그러한 습관은 장경과 지내기 시작한 이후로 뚝 그친 버릇이었지만 버릇은 남에게 주지도 못한다고들 한다. 그는 고윤이 또다시 그때처럼 술을 퍼마실까 친우로서 걱정이 되었다. 고윤은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직 한 병도 다 안 마셨으니까 안심해.”
“이러다가 또 혼날…….”
무언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 심역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제 그의 곁에 술을 마신다고 혼낼 사람은 없었다. 물론 자신도 있었고 그의 주변인들도 고윤에게 잔소리하긴 했지만, 그는 오직 제 아들의 말만 듣기를 고집했다. 어릴 적의 심언이 장경의 부탁으로 애교를 부려 술을 두 잔만 마신 것이 그의 가족이 한 부탁 중 마지막으로 들어준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경은 그에게 소중한 존재였고, 평생 옆에 끼고 살면 가는 날까지 행복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저보다 한참 어린 장경이 먼저 갈 줄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물론 사람이 가는 날은 나이순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키운 것이나 마찬가지인 아이가 그의 손을 떠나가는 것까지 지켜보자니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왜 온 거야?”
고윤은 조금 신경질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물론 왜 왔냐는 말의 절반은 농담이었으나 나머지 절반에는 진심도 조금 섞여 있었다. 그가 왜 왔는지는 모르는 일이나ー그러기에 물어보았을 것이다ー꼭 제 화를 돋우러 온 것 같아서인지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심역은 털썩 앉으며 말했다.
“술이나 같이 마셔줄까, 해서.”
“허, 노쇠하신 심 장군께서 무슨 속셈으로?”
“그러는 고 사령관께서는 노쇠하지 않으셨는지요? 뭐, 전해줄 것도 있어서 겸사겸사 온 거니까, 혼자만의 시간은 조금 후에 가져도 늦지 않겠지.”
자연스럽게 술을 한 병 더 꺼내든 심역은 비어있는 고윤의 잔과 제 잔에 따랐다. 투명한 술을 단숨에 들이켠 심역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서신인 듯했다. 고윤은 심역에게서 병을 뺏어 한 잔을 더 들이켠 후에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폐하께서, 그러니까…. 자네 아드님이 주신 것이네만. 아무래도….”
쿵, 하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분위기를 띄워 보려 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심역의 아드님이라는 호칭에서 약간의 양심의 가책과 함께 욱신거림이 느껴졌다. 또 그것과는 별개로 그에겐 전적이 있었다. 자신이 죽을 것으로 생각한 그는 심역에게 유서를 맡겼다. 그러나 그는 살아 돌아왔고, 심역은 장경에게 그것을 건넸다.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술을 진탕 마신 척을 한 고윤은 하마터면 큰 미인을 종일 달래야 했을 법한 상황을 유연하게 넘어갔더랬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다. 심역에게 유서를 맡긴 것은 고윤이 아닌 장경이었고, 죽을 것을 예상하고 썼다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고윤은 살아 돌아왔으며 장경은 세상을 떠났다. 떠난 이를 추억하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고윤은 이대로 놔둔다면 답지 않게 얼마간 자책을 할 것 같았다.
“......자네가 받는 게 맞지. 열어보게나.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심역의 용건은 이것뿐이었는지 가만히 술을 한두 모금 더 마시더니 착잡한 표정으로 방을 나갔다. 술은 절반 정도 남아있었다.
봉투는 구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끝부분에는 무려 고윤의 필체로 ‘장경’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런 때까지 필체로 장난을 치다니, 정말이지 장경은 자신의 앞에서만큼은 어린아이가 되는 것 같았다. 술잔은 이제 필요하지 않았다. 술병째 들고 조금씩 홀짝이기 시작한 고윤은 조심스레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꺼냈다.
익숙한 글씨체가 그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두려움은 잠시뿐이고, 이내 자신의 사랑스러운 애인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생각이 독한 술의 향을 제치고 머릿속으로 훅 들어왔다. 취기가 단숨에 가시는 것 같았다. 두근거리는 가슴과 떨리는 손, 찌푸려진 미간은 고윤답지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의 사랑스러운 연인은 세상을 떠났고, 그는 여전히 살아있었다. 산 자는 산 자의 삶은 살아가야 한다. 봉투 안의 종이에는 그리 길지 않은, 그러나 애정이 듬뿍 담긴 글이 쓰여있었다. 먹은 이미 마른 지 오래였지만 방금 쓴 것처럼 그윽한 묵향이 훅 풍겨왔다. 고윤은 천천히 그리 길지 않은 글을 읽어내려갔다.
나의 장군께.
편지로 안부를 묻는 것은 오랜만이네요. 계속 붙어 지냈으니 그럴 만도 하지요.
당신이 서북 변방을 지킬 일도, 제가 대전에서 대신들과 공론을 펼칠 일도 없으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분명 제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겠지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때가 있고, 저 또한 사람이니까요.
다만 제가 가고 나면 당신이 홀로 술을 마시다 일찍 저를 따를까 걱정입니다.
사랑스러운 나의 장군이시여, 당신과 마지막을 함께할 수 없어 그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당신의 마지막까지 제가 독점하고 싶었는데 말이죠.
여기까지 읽자 조금 뭉클하였다가도 소름이 돋았다. 마지막을 독점한다고? 그는 장경과 처음 정을 통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빌어먹을 금수 새끼라고 생각하였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금수는 자신이 아닌 장경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점이 특히 사랑스러웠고 어떤 때는 새끼 늑대 같기도 한 것이 제법 귀여웠다. 그렇게 애교를 받아주다 보니 독점욕이 생긴 것이리라 은연중에 짐작하기는 했지만, 장경을 모두 받아들인 고윤으로서는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다시 글을 읽어내려갔다.
당신은 제게 새 삶을 선사했습니다. 안회 마을에서 저를 구했을 때부터, 제 무료한 삶의 이유는 오직 당신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저는 조금 아쉽지만 당신보다 일찍 떠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오래전 경성은 너무 쓸쓸하다며, 당신 외에는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이야기했었죠.
그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경성은 언제나 쓸쓸합니다. 그때보다 아는 사람도 늘었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지만 역시 가족이 가장 좋은 것은 저의 이기심일까요.
고윤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후부에는 확실히 사람이 적었다. 자신과 몇 시종들이 있다고는 하나, 고윤은 서북 변방에 현철영과 함께 있었고 나이 든 시종들은 놀이 상대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갈신과 조춘화는 그가 상대하기에는 너무 성가셨을 것이다. 호국사의 땡중은 벙어리이고, 이복형과 황실 사람들은 달갑지 않으니 과연 쓸쓸할 만도 했다. 그러나 고윤의 마음 중 절반은 대량에 있었다. 안정후로서 제국민을 지켜야 했으니 남은 절반의 마음만으로 장경을 품었다. 가족. 고윤은 이 단어를 천천히 읊조렸다. 그것은 절대 이기심이 아니었다. 장경에게 있어 그리워할 만한 가족은 고윤 하나뿐이었다.
제가 저번에 말한 적이 있었지요. 저는 당신의 말이라면 칼산과 불바다라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대량의 강산이 되어서도, 저는 당신만을 따르고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늦게 오십시오. 저는 언제까지나 이곳에서 기다릴 수 있습니다.
천수를 다 누리고 평안하게 오세요. 조금 더 부드러운 피리 연주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참, 술은 멀리하세요, 자희.
허, 고윤은 기가 찼다. 참으로 끝까지 잔소리뿐인 애인이었다. 그러나 싫지 않았고, 이 어린 애인이 몇 수 앞까지 내다본 것인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피리에 술이라니, 생전 장경이 가장 싫어하였던 고윤의 취미가 아닌가. 그는 틈만 나면 장경이 가져다준 백옥 피리를 불었으나 실력은 전혀 상승하지 않아 그가 직접 쉬운 악보를 구해다 준 적도 있었다. 연습하라며 가져다준 그 악보는 아마 집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터이고, 자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나 누군가가 잘 보관해 두었다면 아마 서고에 있을 것이다. 종이가 구겨지지 않도록 살포시 내려놓은 고윤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쾅 소리가 나도록 세게 방문을 열었다. 고윤이 걱정된 것인지 아직 가지 않은 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서성거리고 있던 심역이 흠칫 놀라며 말을 걸었다.
“자희, 무슨 일이야? 거기에 뭐라 적혀있던가?”
심역의 다급한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발걸음을 옮긴 고윤은 저를 쫓아오는 심역에게 짧게 입을 열었다. 그리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것도 안 하고 쫄래쫄래 따라다니게 두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계평, 나 좀 도와줘.”
“뭐? 지금 뭘 하는…….”
“잠자코 따라와. 찾아야 할 게 있어.”
고윤과 심역은 순식간에 서고에 도착했다. 이곳 또한 한가할 때마다 장경과 함께 그들의 추억을 정리했던 곳이었다. 그곳의 모든 책에는 장경의 숨결과 손결이 남아있었으며, 고윤의 손결도 일부 남아있었다. 고윤은 자주 드나들던 서가에서 책을 한 아름 가지고 나오더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멍하니 있는 심역에게 말을 걸었다.
“뭘 멍하니 보고만 있어? 좀 도와주지 그래.”
얼떨떨한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고윤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심역은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런 면에서 조금 둔한 감각은 없잖아 있었다. 그가 장경이 남긴 편지에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몰라도 또 무언가 일을 벌이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뭘?”
“악보 찾기.”
심역은 제 귀를 의심했다. 정말로 악보 하나를 찾기 위해 이 야심한 시간에 서고에 온 것인가? 유서에 무언가 비밀 지령이 있던 것이 아니고? 그는 정말이지 타고나길 악기를 못 다루지 않았던가! 이러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심역은 진지하게 고윤의 머리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멍하니 서서 무언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심역을 본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제가 꺼내온 책을 하나씩 훑기 시작했다. 분명 그 악보를 받았을 때, 지금에 와서 연습한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냐며 은근히 핀잔을 주면서도 몇 번인가 연습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책 사이에 끼워 넣고 다시는 꺼내지 않았던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몇 분간의 수색 작업 끝에, 다행히도 그가 꺼내왔던 책 중 한 권에서 반으로 접힌 악보를 찾아냈다. 고윤은 뿌듯한 웃음을 지어냈고 심역은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홀가분한 발걸음으로 서고를 나가는 고윤을 쫓아가며 심역은 나지막이 물었다.
“자희, 갑자기 그건 왜…….”
“이거면 돼.”
뭐? 심역은 황당했다. 묻는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이거면 된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 악보라고 하였으니 분명 장경이 가져다준 것일 텐데,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이내 방에 도착한 고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장을 뒤졌다. 잡동사니들 사이로 백옥 피리가 고개를 내밀자 그는 귀한 약초를 본 약초꾼처럼 눈을 반짝이며 피리를 꺼내 들었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온 심역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자희, 지금 뭘 하는 거야? 야밤에 피리라도 불려고? 지금이 몇 시인데…….”
“피리는 내일부터 연습하려고 꺼낸 거야, 나도 양심이라는 게 있지.”
“자네가?”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말투에 고윤은 슬슬 머리에 열이 올랐다.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자꾸 딴지를 걸어? 정말이지 손에 들고 있는 피리로 머리라도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심역의 체면을 세워주기로 생각한 고윤은 실행에 옮기지 않고 평소처럼 받아쳤다.
“뭐? 그럼 내가 양심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아?”
나이가 들어도 이 두 사람의 장난기와 말다툼은 여전했다. 그러기에 진정 친우일지도 모른다. 고윤은 이리 오라는 듯 심역에게 손짓했다. 아까 다 마시지 못했던 술병과 새 술병 하나, 잔 두 개를 꺼내놓고 각각 잔에 술을 따르고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나보고 술은 작작 마시라더군.”
풉. 심역은 술을 입에 갖다 대자마자 그대로 바닥을 적실 뻔했다. 분명 쓰여있기는 ‘술을 자제하라’, 또는 ‘술을 멀리하라’ 등의 말로 적혀있을 테지만 그것은 ‘술 좀 작작 마셔라’ 와 근본적으로 같지 않은가? 장경이 아무리 고상한 어투로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이 고윤의 입을 거치면 길거리의 시정잡배들이 하는 말을 아주 약간 순화한 수준이 되었다. 아마 장경의 마지막 말이 모두 고윤의 입을 거쳐 새로이 기록된다면 길거리 패싸움의 우두머리가 심하게 맞고 부하들에게 남기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 술을 줄일 필요는 있지.”
“그래서 아예 끊으려고.”
“......”
나이가 들더니 이제 슬슬 귀도 맛이 가는 건가, 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상한 말이었다. 심역은 다시금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과연 고윤이 맞는가? 여우 요괴가 그의 탈을 뒤집어쓴 것은 아닐까? 능글맞은 성격이 제법 고윤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귀신 따위는 믿지 않았고 제 앞에 있는 이는 틀림없이 고윤이었다.
“왜, 못 믿겠나? 내 약조하지, 공식적인 연회가 있을 때를 제외하곤 한 방울도 마시지 않겠어.”
아마 진경서가 들었다면 잘 생각했다며 손뼉을 쳤을 만한 발언이었다. 그 안정후 고윤이 술을 끊겠다 선언하다니, 천지가 새로 개벽할 모양이었다. 심역은 당황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고윤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부탁 들어주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자네가 왔을 때 내가 눈치채지 못해도 이해 좀 해줘. 아마 피리 연습을 하고 있을 테니.”
“......그래. 야밤에 불지만 마. 다들 안정후가 노망이 난 모양이라고 수군거릴 테니.”
고윤은 잠시 뜸을 들인 뒤 말했다.
“참, 진 소저께 부탁드릴 게 있는데. 전해줄 수 있나?”
“무슨?”
“안신산이 조금 필요해서.”
***
그 이후로 고윤은 정말 조용히 지냈다. 물론 피리 소리는 더 시끄러워졌으나 여러 번 들으니 조금씩 나아지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였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진경서는 그에게 앞으로 이렇게만 산다면 신선도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과장하여 말했다. 가끔 큰 연회가 있을 때는 두 잔을 고수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잔은 항상 집에서 따른 후 제집 앞마당에 뿌렸다. 석 잔을 채 마시기도 전에 어디선가 나타나 잔을 채가던 장경을 위해서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경성은 쓸쓸했고, 고윤은 장경이 아니면 그리워할 사람이 없었다.
대량제국에 최초로 들어선 기차는 여전히 운행 중이었다. 서북 변방은 평화로웠고, 이 모든 것은 10년 안에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고윤이 대량제국의 강산을 지켰다면 태시제 이민은 그 자체로 대량의 강산이었다. 그들에게서 나던 탕약과 안신산의 냄새를 맡는다면 누구라도 그 시절을 떠올렸을 만큼, 그들은 제국의 방방곡곡을 세심히 살피는 참된 통치자였다.
고윤은 장경에게 삶이나 죽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었을 때, 자신을 따라오고 싶다면 그렇게 둘 생각이었고, 따라오지 않으면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장경은 제게 계속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이제 탕약 대신 안신산의 향을 풍기는 고윤은 피리 연습에 매진했다. 어느 날은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고, 어느 날은 귀신이 곡하는 듯한 소리가 나기도 했다. 만에 하나 정상적인 소리가 나는 날에는 크게 기뻐하며 다음 곡조로 넘어갔다. 심역과 만나는 날에는 자신이 그동안 연습한 부분을 들려주기도 했으며ー물론 심역은 듣기는커녕 보기조차 싫다며 도망 다니기 바빴다ー그를 대신하여 이제 거의 어른만치 장성해 제 어머니를 좇는 심언이 그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 세월은 빠르게 흘러 어느덧 희끗희끗하던 귀밑머리가 하얗게 셀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고윤은 그동안 몇 번이고 생각했다. 왜 자신이 아닌 심역이었을까? 그가 심역에게 남겼던 서신은 결국 장경의 손에 들어갔지만, 일단은 그 또한 심역에게 주었다. 첫 번째로 그를 믿을 수 있어서였고, 두 번째로 제 생각이 너무 멀리 갈 것을 대비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이에게 괜한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다. 특히 만약 그때 당시 고윤이 직접 그 서신을 전해주었다면 장경은 울며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고윤에게 매달렸을 터였다. 고윤이 그걸 예상하였기에 심역에게 준 것이었지만 장경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단순히 심역을 믿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상태를 고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었을까. 어느 쪽이든지 고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는 것만큼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직접 유서를 받고, 장경이 떠난 후 열어보았더라면 공허한 기분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역에게 전달받음으로써 그가 왜 나에게 직접 주지 않은 것일까, 라는 질문으로 몇 년을 고민하고 그의 당부를 따르며 지낼 수 있었다. 옆자리가 비어 쓸쓸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괜찮다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훗날 장경과 재회했을 때 그가 기뻐한다면 그걸로 족했다. 몇 년간의 외로움 정도는 고윤이 안회 마을에서 장경을 데려오고 몇 년간 그를 돌보지 못한 값을 치르는 것으로 생각하면 편했다. 어린 날의 장경이 가지고 있던 외로움을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외로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어린아이였다.
대량의 강산을 지키는 이의 눈은 보이지 않았고 귀는 들리지 않았다. 마음의 절반을 제국에 바친 그는 남은 절반으로 그의 의붓아들을 힘껏 사랑했다. 모든 일이 일단락되고 더는 대량의 강산을 지키지 않게 되었을 때도, 언제나 마음을 절반으로 나누어 강산과 연인에게 분배하였다.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온전히 장경만을 마음에 담을 수 있게 된 그는 처음 사랑을 알아가는 어린아이같이 설레고, 떨리면서도 그리웠다. 고윤은 이 감정을 재회를 위한 기다림이라 생각했다.
어두운 눈이 밝아지고, 다시 어두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는 그저 한바탕 꿈일 뿐이다. 사람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고, 대량의 강산이 된 장경의 너른 품에 안길 자격이 있는 사람은 고윤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잡아 다섯 글자를 써 내려갔다.
생사불강구生死不强求, 이 다섯 글자는 그가 장경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자신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생과 사를 강요할 수 없으니 좋을 대로 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이 말은 그에게 전해졌으나 체감하지 못했다. 그도 그런 것이 고윤은 죽지 않았고, 그날 밤의 임기응변 덕에 별말 없이 지나간 탓이었다. 그에 비해 장경의 유서는 안부를 묻는 서신 같았다. 자신의 당부를 전하면서도 고윤을 향한 제 사랑을 남김없이 드러내 그의 삶에 남은 미련이란 더 살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대량의 강산이 되는 것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하나 사람이 어찌 죽음 앞에서 태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인간이고,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다. 그들 모두가 언젠가는 이 땅의 흙으로 돌아갈 테다.
하늘은 높고 밝은 햇살이 방안을 한가득 비추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조용히 붓을 내려놓은 고윤은 백옥 피리를 집어 이제는 익숙해진 곡조를 천천히 연주했다. 저 멀리 후부의 입구로부터 익숙한 모습의 너른 품과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가 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