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終天之慕
변절자
아득히 넓은 대량에 평화가 찾아오고, 태시제가 임시로 즉위한 지도 벌써 수 해가 지났다. 그새 무럭무럭 장성한 태자는 옥좌에 오르기 위한 소양을 기르는 데 열심이었다. 태시제는 그에게 많은 것을 가르치고 넘겨주었다.
그 이면에는 자연히 바빠진 장경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업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동시에 태자까지 신경 썼다. 그러다 보니 상당히 긴 기간을 피곤함에 절은 채로 보냈는데, 그러면서도 꼭 후부로 돌아와서 고윤의 침상에 기어들어 간 다음에나 기절하듯 잠들었다. 처음에는 누가 이렇게 무리하게 하는지 때려 주겠다던 고윤은, 점차 말없이 장경을 보듬어 안는 것으로 그의 힘이 되고자 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익숙한 품을 내어 주는 것이 더 좋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장경은 고윤의 차갑게 식은 몸을 속상해할 틈은 없어도, 더욱 가까이 끌어안아 데울 수는 있었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장경의 본래 성질이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
도중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그는 온종일 고윤 곁에 붙어 칭얼거렸다. 자희, 일어나셔야 해요. 조반을 가져올게요. …제가 안 볼 때 술병을 여신 건 아니겠죠? 나중에 확인해볼 거예요. 자희, 안아주세요. 자희…….
고윤은 꼬박꼬박 응했다. 그래, 일어나마. 네 몫의 수저도 잊지 말거라. …글쎄다. 으음, 이리 와. 방금 이불에서 나와 따뜻할 것이다.
장경이 기꺼이 고윤에게 파고들어 온기를 나누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고윤은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매만지며 웃었다.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미련을 잔뜩 남기면서도 식사를 가져오는 모습은 퍽 귀엽기까지 했다.
이것이 평화의 달콤함일까. 고윤은 자신의 마음이 한층 편해졌음을 느꼈다. 장경이 장담하였듯, 앞으로는 이보다 좋은 날들이 이어질 것이다. 이 맹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갖췄으니까.
그래서 넌지시 들려온 말에 고윤은 그만 집던 반찬을 떨어뜨렸다.
“무어라?”
“유서 말입니다. 과거에 자희가 그 비슷한 것을 내게 주려 하셨지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불태워 버렸다. 필요도 없고. 너도 잊은 줄 알았는데.”
“예. 과거의 일에는 얽매이지 않기로 했어요. 그러니 대신, 차례를 넘겨주세요. 제가 숨기고 당신이 찾는 겁니다.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고윤은 한 번 더 깜짝 놀랐다. 그의 일생을 바친 후, 장경은 항상 솔직했다. 고윤에게 해 주고 싶은 일은 곧바로 행했으며 입 밖에 내고 싶은 말은 망설임 없이 내뱉었다. 한결 부드럽고 온순하지만, 안회 마을에 살던 시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건 당장 고윤이 걸친 피풍의만 봐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에두른 말하기는, 고윤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고윤은 고개를 숙인 채 수줍어하는 미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느꼈는지 얼굴을 살짝 들어 미소 지었다. 고윤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그러지 않아도 고분고분 수용하겠다는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고 씨 아무개는 아들에게 아주 약했다. 부탁을 세 번 이상 내쳐 본 적이 전무할 정도였다. 장경이 이제 와 죽음을 대비했다는 사실에 잠시 동요했을 뿐,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결국 잇새로 즐거운 소리를 흘리며 대답했다.
“좋다! 어디 한번 꼭꼭 숨겨 보려무나.”
이른 새벽, 장경은 부스럭 소리조차 내지 않고 침상을 나섰다. 고윤은 기민한 감각 탓에 잠깐 깼으나, 장경의 팔목을 약하게 붙들었다 놓는 게 끝이었다. 후부의 안주인은 다시 고른 숨을 내쉬는 제 남편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 이불을 끌어 올려 주었다.
고윤이 제대로 일어났을 때, 그는 푹신한 천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어렴풋한 안신산 향이 곁을 맴돌았다. 계절을 가리지 않는 새들이 지저귀며 해가 중천이라 알렸다.
대충 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노복들이 느릿한 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고윤은 우선 요기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복도를 지났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노복 한 명이 만두를 그릇에 담아 건넸다. 고윤은 무심결에 받아 들다가, 문득 어제의 약속이 떠올랐다.
‘후부 바깥에 감출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 냉큼 발을 들였다. 노복은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마음대로 하시라는 듯 허리를 꾸벅 숙이고 사라졌다. 방금 만두를 꺼낸 솥에서 김이 새어 나왔다. 그 뚜껑을 슬쩍 열었다가 얼굴이 촉촉해졌다. 고윤은 한숨을 내뱉고 찬장부터 천천히 뒤적였다. 장경이 자주 쓰는 조미료들이 손에 잡혔다. 출처를 알 수 없던 향도 무엇인지 찾아냈다.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고윤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이것저것 건드렸고, 이내 부엌 뒤편의 식자재 창고까지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말끔하게 정리된 광경이 인상적이었다. 장경의 성격이 여지없이 보였다. 고윤은 상자들을 들어내고 최대한 음습한 곳을 탐색했다. 이런 곳에 있을 법한데, 하고.
그렇게 차근차근 비우기를 한참. 마지막으로 왼쪽 구석의 채소들을 치우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허탕이로군.”
고윤은 턱에 검지를 갖다 대고, 고민하는 자세로 혀를 쯧 찼다. 비스듬히 착용한 유리경이 흘러내렸다. 유서는커녕, 종이 비슷한 것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뭐, 오래 묵은 술병을 하나 찾아냈으니, 수확이 없었다고 할 수야 없지만. 왜 이런 것을 남겨두었는지는 몰라도, 언젠가 유용할 터였다. 고윤이 만족스레 웃으며 술병을 제자리에 도로 밀어 넣었다. 나머지는 적당히 청소하려다 실패한 흔적으로 남겼다.
창고를 빠져나와 대문 쪽을 곁눈질했다. 황혼이 붉게 반짝였다. 그 아래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등청한 장경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것이다. 고윤은 스스로 재촉해 욕탕으로 향했다. 다음으로 떠오른 곳이었으므로.
그곳은 간소한 온천 형태를 갖췄다. 규모는 작아도 따뜻한 물이 가득 차 있어, 보는 사람에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고윤이 겉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고는 탕 주위를 마구 맴돌았다. 쉴 목적으로 만든 의자 두어 개 외에는 황량했다. 설마, 하며 물에 발을 담그자 얇은 침의가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고윤은 물결에 파문을 만들며 바닥을 살폈다.
그럴 리가 없나. 헛웃음을 지었다. 들어온 김에 목욕이나 하고 나가기로 했다. 깊이 잠겨 있으려니, 목 아래에서 시원한 향이 은근하게 올라왔다. 누가 풀어 놓았는지 알 만했다. 고윤은 상쾌한 기분을 만끽하며 깨끗하게 씻었다.
복도에 드문드문 등이 켜졌다. 이전에는 모퉁이에 몇 개 두는 것이 다였는데. 고윤이 중얼거렸다. 장경이 알게 모르게 한둘씩 늘려, 이제는 가는 길마다 환했다.
“이래서야 밤인 줄도 모르겠구나.”
혼잣말은 거기서 그쳤다. 고윤은 방으로 돌아왔다. 한쪽에 자리 잡은 책상이 서류를 한가득 품고서 고윤을 반겼다. 제 몫의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약간 간섭하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시급하지 않은 것들을 처리한 뒤 따로 뺐다. 그러는 동안 유서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자시, 와사등이 희부옇게 변했다. 취침을 종용하는 듯했다. 고윤은 붓을 헹궈 통에 꽂았다. 널찍한 침상에 뛰어들기 무섭게 이물감이 느껴졌다. 천천히 베개를 들었다. 얇은 종이가 가지런히 접힌 상태로 놓여 있었다. 구김 하나 없이 말끔했다.
왜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후부의 모든 곳에는 장경의 손길이 닿았다. 그중 가장 많이 다듬어진 곳이 그들의 방이었다. 반나절 헛수고했다 싶었다. 그러나 기대가 부푸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고윤은 후회 따위 내버리기로 했다.
종이는 잘못 건드렸다간 바스러질 것처럼 연약했다. 장경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얼러서 폈다. 의외로 매끈한 표면이 손가락 아래로 느껴졌다.
자희, 제가 그리워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당신이어서 다행입니다.
보지 못했을 매화를 동봉합니다.
고작 두 문장. 과연 거창하지 않게 숨겨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고윤의 필체를 모방하지 않은, 장경 고유의 것이었다. 다른 방향으로는 연습을 별로 안 하였는지 꾹꾹 눌러쓴 모양새가 변방에서 받았던 편지와 닮았다.
아래쪽에 버석하게 마른 매화 꽃잎이 위태롭게 붙었다. 진실로 몇 년 전의 그것일지 확신은 없었다. 장경이 그렇다니, 그렇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한편 기분이 묘했다. 유서라며 긴장하게 할 때는 언제고, 이리도 단출한 내용이라니. 죽기 전 할 말이 그렇게도 없나. 장경이 옆에 있었다면 머리를 쥐어박았을 것이다. 고윤은 종이를 잘 접어 품에 넣었다.
편지를 받았으니, 답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뜻밖의 방문을 받은 장경은 드물게 당황했다. 획이 삐쳤다. 고윤이 픽 웃으며 그것을 가리켰다.
“주의해야지.”
“아. …그렇네요. 무슨 일이신가요? 의부.”
고윤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품에서 종잇조각을 꺼내 가벼이 흔들었다. 그제야 장경이 평온을 회복했다.
“찾으셨군요.”
“모를 수가 없더구나.”
“…….”
“그런데도 내가 이걸 발견하는 데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면 놀랄 거다. 아무튼, 무슨 일인가 하면…….”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고윤은 눈 깜짝할 새 계단을 올라와 장경의 책상 앞에 섰다. 그들 외의 사람은, 심지어 시종 한 명까지도 물렸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고윤이 몸을 숙이자 미처 묶지 못한 머리칼 한 줌이 흘러내렸다.
장경이 눈을 깜박거렸다. 차갑고 건조한 입술이 옅은 온기를 품은 입술을 머금었다. 고윤은 능숙한 동작으로 장경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틈을 벌렸다. 호흡이 뒤섞였고, 열기가 응축되었다. 장경도 금세 호응했다. 간격이 벌어진 찰나, 잘게 부서진 목소리로, 고윤이 속삭였다.
“매화를 잃고 미인을 얻었으니, 내 아쉬울 게 없다.”
잠시 후, 속뜻을 알아챈 장경이 짓씹듯 응수했다.
“…그럼 저는 자희를 받아 가겠습니다. 약속하셨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고윤은 능청을 떨었다. 달래주듯이, 장난스럽게.
“오, 이 한 몸은 이미 폐하의 것인데요. 그것도 평생.”
“하하, 지금 증명하시는 건 어떱니까?”
“응? …여기서 말이냐?”
…물론, 이번에도 지는 쪽이 누구일지는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