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遺産
이르쥬
창고에서는 오래 묵은 먼지가 피어올랐다. 문틈으로 발을 내딛은 햇빛이 주홍빛의 또렷한 경계를 그려냈고 색이 입혀진 한 줄기 선이 지나는 곳마다 멈췄던 시간이 다시 움직였다. 민은 문과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람이 통하자 작은 창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비일상의 공기도 금세 흩어져 사라졌다. 늦겨울의 추위가 그 빈자리를 냉큼 채웠다.
작게 숨을 내쉬자 옅게 입김이 퍼졌다. 문과 마주 보는 창문의 양편으로 책장이 하나씩 놓인 작은 공간이었다. 어쩌면 서재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적합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사람은 언제나 이 방을 창고라고 불렀다. 그는 어린 민에게 말하곤 했다. 창고는 들어가면 안 되니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놀자, 착하지. 민은 창고의 한가운데에 서서 천천히 안을 둘러보았다.
이곳에 그 사람이 숨기고 싶었던 것이 있을까. 혹은 숨기는 게 아니라 민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책장에 꽂힌 것들은 시첩과 역사서, 온갖 고서적과 복잡한 설계도 지도첩 잡서…… 여러모로 의미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오래된 책들이었다. 그 사람이 이런 것에 관심이 있었던가? 민은 손에 잡히는 한 권을 꺼냈다. 어지럽게 펼쳐진 옛 문자 사이로 몇 가지 낯익은 단어가 보였다. 대량, 대량제국. 민은 다른 책을 꺼냈다. 대량철도노선전도, 안정후 서간집, 영추원일기, 다음 권도, 그다음 권도. 이것들은 모두 이백 년 전에 멸망한 옛 나라의 기록이었다.
* * *
옛 경성에 자리한 역사(驛舍)는 몇 번이고 증축을 거듭해왔으나 외벽만큼은 여전히 고풍스러운 세월감이 남아 있었다. 이제는 관광명소가 된 고택들이 줄지어 늘어선 거리는 드문드문 자리한 노점과 떼로 몰려다니는 양인 관광객을 포함해도 그럭저럭 고풍스러운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보존되어 있었다. 사진 기계를 든 금빛 머리칼의 꼬마 서넛이 민의 옆으로 뛰어가며 저희 나라 말로 꺅꺅거렸다. 마찬가지로 밝은 머리색의 양인 어른 몇이 아이들을 부르며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갔다.
민은 역에서 챙겨온 작은 안내 책자를 손에 쥐고 묵묵히 걸었다. 황궁을 중심으로 뻗은 대로의 양편으로 높은 누각과 화려한 건축물이 늘어서 있고, 남편으로 향하면 큰 점포들이 늘어선 상가 거리가, 북편으로는 고관대작의 저택들이 자리했다. 규모와 역사가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수복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사실상 상가 거리는 몇 개의 주요 점포를 제외하면 거의 터만 존재했고 일반 주거지와 빈민굴이 한 쪽씩을 차지했던 서편에서는 과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민은 맡아질 리 없는 화약 냄새를 느꼈다.
북을 향해 한 식경쯤 걸었을 무렵, 민은 한 고택 앞에서 멈춰섰다. 흉포한 짐승 머리 두 개가 장식된 거대한 대문의 위로 현판이 걸려 있었다. 〈安定侯府〉, 이 네 글자를 보자 민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가 제게 남긴 것이 없을까요, 아주 작은 것이라도, 그저 한 마디라도…….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어른들 사이로 머리 하나는 작은 아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이는 속삭이듯 애원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이글거리는 열기가 공기를 한껏 데워 숨이 막혔다. 낯선 공간과 낯선 얼굴, 먼 곳에서 실려온 탄내와 어지럽게 쏟아지는 와사등의 흰 불빛. 저는 그의 뼛조각 하나도 간직할 수 없나요? 누군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쓰럽고 불쌍한 것을 대하듯이, 그렇게.
그 사람은, 민의 유일한 가족은 아무런 말도 인사도 언질이나 통보도 없이 갑작스레 민의 인생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러니 그 사람의 글씨로 적힌 구깃한 쪽지 한 장은 그가 잠시간의 꿈이 아니라 실제로 민의 곁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몇 안 되는 물건이었다. 민은 그 사람의 창고에서 이 쪽지를 발견했다. 단정한 필치로 적힌 네 개의 글자와 옛 경성으로 향하는 오래된 기차표 한 장은 지금도 민의 주머니 한쪽에 들어있었다.
안정후부.
민은 묵직한 대문에 손을 얹었다. 빗장을 움직이는 서른여섯 개의 기계장치가 삐걱거리는 소음과 함께 방문자에게 길을 내주었다.
후부는 고요했다. 가림벽을 지나자 이미 식어버린 관절 위로 이끼를 덮은 채 문지기를 자처하고 있는 철 괴뢰가 보였다. 그가 땅 위에 못 박혀 긴 세월 지키고 있는 것이 말라버린 초목만 듬성듬성 자리한, 황량하기 그지없는 정원이라는 점만이 그의 녹슬지 않은 충정을 고독하게 만들었다. 민은 이토록 지극한 옛 시대의 유물에 잠시 시선을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 살펴보려는 생각이었다.
이때, 민의 뒤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금속이 쓸리는 기분 나쁜 소음이 몇 차례, 그리고 무거운 물체가 지면에 부딪치는 소리가 다시 몇 차례. 녹슨 기어가 힘겹게 돌아가며 내는 끼익 소리가 귀를 긁었다. 민은 침착하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등 뒤까지 철 괴뢰가 다가와 있었다.
민은 그대로 힘이 풀려 주저 앉았다. 괴뢰가 걸을 때마다 금속 사이로 자란 풀잎과 이끼, 마른 잎사귀와 그 위에 붙어 있던 작은 애벌레가 땅으로 떨어졌다. 괴뢰는 민이 물러선 거리만큼 다가와 멈췄다. 민이 주저앉은 그대로 뒤로 물러나자 괴뢰도 다시 그만큼 걸어왔다. 커다란 몸집의 흉흉한 철 기계가 민의 움직임에 맞춰 아주 조금씩 걸음을 옮기는 모습은 어찌 보면 우스울 정도였다. 민은 이 괴뢰가 움직이리라고는 추호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괴뢰는 민이 더는 물러나지 않자 그 거대한 몸에 어울리는, 마찬가지로 거대한 팔을 들어올렸다. 민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그대로 잠시 멈춰 있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슬쩍 눈을 뜨니 괴뢰는 얌전히 팔을 앞으로 뻗은 자세였고, 그 팔에는 작은 찬합이 걸려 있었다. 그 몸짓이 민에게 찬합을 건네주려는 것 같았다.
민은 천천히 일어난 다음, 우선 풀잎과 먼지가 붙은 옷을 털었다. 옷매무새가 정돈되자 괴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이며 찬합을 잡았다. 괴뢰의 팔에서 찬합을 빼낸 민은 경계와 호기심이 뒤섞인 마음으로 뚜껑을 열었다. 찬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민은 순간 몰려온 실망감을 숨길 수 없었다.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어쩌면 그 사람이 이곳에 날 위한 보물 찾기라도 숨겨놓았을까?
민은 찬합을 닫았다. 뚜껑을 닫는 손길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뚜껑을 닫자 찬합 안쪽에서 작게 덜컹이는 소리가 났다. 다시 찬합을 여니 이번에는 작게 접어 두꺼워진 종이가 들어 있었다. 뚜껑을 뒤집자 말라붙은 풀 자국이 있었다. 그 사람이 장난으로 민을 놀린 후의 실없는 웃음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민은 순간 화가 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잠시 뒤에는 더 이상 그 사람에게 화낼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종이는 어찌나 열심히 접었는지 잘 펴지지 않아 몇 번이고 찢을 뻔했다. 조심스레 펼치니 역시나 그 사람의 글씨였다.
이런 양나라식 철 괴뢰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일 텐데 어찌, 충분히 놀랐느냐? 연식은 오래되었지만 이 녀석이 나름 귀한 것이라, 세심하게 아껴주면 몇 배로 곁을 지키며 정을 갚으려 하니 마땅히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내 이것에 '장경'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네가 보기에도 괜찮은 이름일지는 모르겠다. 실은 괴뢰가 아닌 다른 것에 이 이름을 붙이려고 생각해두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러지 못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나마 달래기 위해 이 아이에게 이름을 주었지. 아무래도 남들 앞에서 부르기엔 민망하여 홀로 있을 때에만 두어 번 이름을 불러본 게 다지만 말이다. 언젠가 내가 장경을 돌보지 못하게 되면, 그때에는 네가 장경을 아껴주었으면 좋겠구나.
내가 장경을 아끼고 사랑한 만큼 너도 장경을 사랑해 준다면 기쁠 것이다.
서신은 짧았다.
보내는 이도, 받는 이도 없이 제 할 말만 늘어놓은 엉망인 문장이었지만 형식따위야 어찌 되든 좋았다. 민은 이 몇 개의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그러니까 이건…… 그 사람이 자신에게 남긴 유산인 것이다.
심장이 달음박질쳤다. '장경'은 여전히 팔을 앞쪽으로 뻗고 얌전히 서 있었다. 민은 뻣뻣한 팔에 다시 찬합을 걸어주었다. 그러자 '장경'이 돌연 몸을 돌려 어디론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괴뢰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땅이 진동해서 평화로이 졸던 참새들도 깜짝 놀라 달아난 잠을 쫓아 날개를 퍼덕였다.
'장경'은 후부를 익숙하게 가로질렀다. 괴뢰는 중간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움직이기를 반복했는데, 워낙 오래 정비하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녹이 슬어 그런 것을 알면서도 민은 '장경'이 자신의 걸음을 기다려 주는 것만 같다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하나의 괴뢰와 한 명의 사람이 멈춰 선 곳은 어느 방 앞이었다. 크기로 보나 위치로 보나 주인이 쓸 법한 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 침실이었다. 다만 방 크기에 비해 가구가 적고, 그마저도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더군다나 곳곳에 먼지가 쌓여 도무지 이 큰 후부의 주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방 안을 둘러보던 민은 침상 머리맡에 걸린 여우 갖옷 위에서 서신을 찾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길지 않은 내용으로, 그 사람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기댈 수 있는 이가 오직 자신 하나뿐인 이들은 스스로를 설원의 눈보라로 내몰기 마련인지라, 추위에 손이 곱아 쥐었던 것조차 쉬이 놓치게 됨을 알면서도, 막상 나는 그들과 다르다 여긴 세월이 길어지니 추위를 모르는 몸이 되었다 뻐기게 된다. 고통을 느낄 손가락이 이미 끊어진 것은 생각지 않았으니 뒤늦게 칼을 들어도 겨울은 벨 수가 없구나.
그러나 손발이 모두 끊어져도 품은 남아있을 테니 술에 취하지 않으면 온기에 취해 꿈에서 계절을 건널 수 있다면 서리와 눈으로 내몰리더라도 어찌 괴로울까?
장경은 민을 데리고 후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때마다 민은 짧은 서신을 발견했다.
이름 없는 할풍인의 칼날에서,
난세에 임하는 영웅이 아니 되더라도 누구에게나 세상은 닥쳐오기 마련이다. 피해지지 않는 것을 피하려 한다면 해결되지 않는 괴로움만이 늘어갈 뿐이니 스스로를 공연히 괴롭힐 필요가 없다…….
작고 볼품없는 가죽 보호대 안에서,
미숙함과 불완전함은 같지 않고 거칠다 하여 아름답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사물의 이치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인연이라고 다를까.
작은 목조의 뱃속과 옥피리의 구멍과
모든 사소한 일들이 일대의 사건으로 변하는 이유란 단지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빈 술독의 안과 벼루의 아래와
삶과 죽음은 강요할 수 없고
옷가지와 솥뚜껑과
흐르는 강물을 둑으로 막는다 하여 바다로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문지방과 와사등과 이불보와
허나 물은 흘러도 여울은 여울대로 있으니
아궁이와 목간, 마루와 그릇장에서
네게서 받아 간 시간을 아쉬워하지 않기를
그리고 다시 정원.
네가 외롭지 않으면 좋겠구나.
하늘로 뻗은 매화 가지 위로 소리 없이 눈이 내렸다.
장경은 매화나무 아래에 멈춰 섰다. 마지막 서신이 그곳에 있었다. 이르게 피어난 매화의 꽃잎은 흰빛으로 내려와 투명하게 녹는 눈꽃의 사이에서 그저 붉었다. 그는 꽃이 핀 가지마다 이제까지 찾았던 서신들을 묶었다. 눈보다도 흰 종이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겨울이 지나면 이 또한 눈과 함께 녹아내릴까.
뒤를 돌아보니 몇 걸음 뒤에서 초조하게 저를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장경은 그들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내 잠시 단 꿈에 빠졌을 뿐이니 그대들은 염려할 것 없소."
경성은 아직도 깊은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나 대량은 끝끝내 질긴 숨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어떠한 의무도 짊어질 책임도 없이 그저 평범한 보통의 가족으로 평화로이 살아가는 나날 역시 아직은 오지 않을 터다. 설령 그러한 날이 오더라도 그 사람의 인연과 다시 한번 얽힐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다.
안정후 고윤은 전사하며 어떠한 전언도 남기지 않았다. 온전하지 못한 시신은 피와 살점으로 더러워진 백지 한 장만을 품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런 헛된 망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당신의 다정한 말이 영원토록 이어진다 하여도 나는 결코 당신을 놓아줄 수 없을 텐데.
꽃잎은 망자를 위로하는 흰 비단에 스스로를 수놓고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남겼다. 말 한마디로 채워질 수 있는 공백이었다면 차라리 비워버리는 편이 낫다. 대신 당신이 내게서 앗아간 시간만큼을 끝없이 곱씹으며 내게 주어진 여백을 더듬어 나가는 수밖에.
아이는 작고 아늑한 창고에서 제 흔적을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